
“어린이 동화 속 모험을 넘어선, 인간과 사회의 위선과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풍자한 성인용 풍자 소설”
어린 시절, 우리에게 ‘걸리버 여행기’는 소인국에 간 거인 아저씨의 신나는 모험담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다시 펼쳐본 조너선 스위프트의 원전은 동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이라는 종(種)에 대한 서늘한 보고서에 가까웠습니다.
동화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날카로운 칼날
우리가 흔히 아는 릴리퍼트(소인국)와 브롭딩낵(대인국)의 이야기는 전체 4부 중 절반에 불과합니다. 스위프트는 이 여정들을 통해 당시 영국의 정치와 사회를 조롱하지만, 그 화살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정확히 날아와 꽂힙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달걀을 어느 쪽으로 깨느냐를 두고 전쟁을 벌이는 소인국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본질보다 형식을, 가치보다 진영을 우선시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예나 지금이나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가장 인상깊었던 4부: 야후(Yahoo)와 후이넘
많은 분이 놓치고 지나가는 4부 ‘후이넘 나라 여행기’는 이 책의 백미입니다. 이성적인 말(馬)인 ‘후이넘’과 짐승 같은 인간 ‘야후’가 대조되는 이 공간에서, 걸리버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에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검색 엔진 ‘Yahoo’의 어원이 바로 여기서 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참 아이러니합니다. 스위프트가 묘사한 야후는 탐욕스럽고, 불결하며, 오직 본능에만 충실한 존재입니다. 걸리버는 그들 사이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절망하죠.
“나는 이성적인 후이넘에 가까운가, 아니면 본능에 휘둘리는 야후에 가까운가?” 세상이 발전하고 문명이 진보했다고 하지만, 우리의 내면은 여전히 야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서늘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마치며: 남겨진 문장들
‘걸리버 여행기’는 읽는 내내 불편함을 줍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이 책이 가진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스위프트는 우리에게 예쁜 그림을 보여주는 대신, 우리의 추악하고 부끄러운 면을 가감 없이 비추는 거울을 들이밉니다.
437p 그러나 그(휴이넘)는 이성을 주장하는 (인간이란) 동물이 그런 극악무도한 악행들을 저지를 수 있다면, 그런 이성 능력의 타락이 순수한 야수의 본성 자체보다도 훨씬 더 나쁠 수 있을 거라며 두려워했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가진 것은 이성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타고난 악을 증가시키기에 적합한 어떤 자질에 불과한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이 보였다. …(중략)… 우리가 스스로 주장하듯 정말 이성적인 동물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피해야 할 일을 보여주는데 자연과 이성만 있으면 충분한 지침이 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